신춘시장(新春市場) 근처의 객잔에 자리를 잡은 지 며칠이 지났다. 복건성 일대의 정보가 모이는 곳이라, 강호의 동향을 살피기에 용문객잔보다 유리했다.
신춘시장에 처음 나간 날, 약재를 사러 가는 길에 묘한 인연이 생겼다. 시장 초입부터 비린 생선 냄새와 마른 약재의 퀴퀴한 풀 내음이 뒤엉켜 코를 찔렀다. 밤새 내린 비에 질척해진 흙바닥이 짚신 밑에서 질퍽질퍽 소리를 냈고, 양쪽 좌판의 상인들이 저마다 목청을 높여 호객하는 소리가 좁은 골목 안에서 겹겹이 울렸다. 그 소란 속에서 같은 방향으로 걷던 낭인 하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꾸 눈에 들어왔다. 낡은 검집을 허리에 차고 있었으나 검사의 위세 같은 것은 없었고, 오히려 보따리 장수에 가까운 행색이었다. 셋째 골목을 같이 꺾었을 때 그 사내가 먼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같은 길을 이렇게 오래 걸으면, 모르는 사이도 동행이 되는 법이지요."
초우진(楚宇鎭)이라 했다. 복건성에 연고는 없고 떠돌다 흘러들어온 것이라 했다. 말투는 가볍되 눈빛에는 어딘가 지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약재 가게까지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별 대단한 대화는 아니었으나 처음 만난 사이치고 어색하지 않았다. 헤어지며 "이 근처에 머무르니 또 보게 되겠지요"라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약재를 사고 돌아오는 길, 시장 구석의 허름한 차일 아래에서 한 소녀가 점괘를 봐주고 있었다. 앞에 놓인 산가지와 낡은 주역 책 사이로 작은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이가 열대여섯쯤 되어 보였으나, 손님에게 괘를 설명하는 태도는 노련한 역사(易士)의 그것이었다. 아청(雅晴)이라는 이름이었다. 지나가다 눈이 마주치자 "오늘 운세가 궁금하지 않으세요?"라며 살짝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정중히 사양하고 지나쳤으나, 어딘지 기억에 남는 소녀였다.
밤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신춘객잔의 이층 난간에 기대어 서서, 나는 멀리 복건성의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산등성이를 따라 은빛 물결처럼 흘러내렸지만, 그 아래로 짙은 어둠이 계곡을 삼키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빛과 그림자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나뉘어 있는 듯했다.
"찾고 있었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연월향이 난간 옆에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경공은 여전히 나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다.
"무슨 일이오?"
내가 묻자 연월향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평소의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소식을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최근 복건성 외곽에 검은 옷을 입은 무인들이 출몰하고 있어. 그들은 '흑사맹'이라는 조직의 수하로 보여. 특히 좁은동굴 일대에서 자주 목격되고 있어."
흑사맹(黑蛇盟).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으로만 듣던 이름이었다. 사파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게 활동하는 조직, 독과 암기를 주무기로 사용하며 강호의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는 자들.
"흑사맹이라... 그들이 왜 좁은동굴 근처에?"
"그건 나도 확실히 모르겠어. 하지만 남궁 사숙께서 말씀하신 비급의 조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철 사숙께서 말씀하신 천잔검보(天殘劍譜)의 조각들. 첫 번째 조각이 좁은동굴 깊은 곳의 석함에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사숙께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고맙소, 연 낭자."
연월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난간 위로 몸을 날려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참 동안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와 검을 챙겼다.
---
다음 날 새벽, 나는 좁은동굴을 향해 길을 나섰다. 아침 안개가 산길을 뒤덮고 있었고, 이슬에 젖은 풀잎이 발밑에서 스르르 미끄러졌다. 좁은동굴은 복건성 외곽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 위치한 자연 동굴로, 그 이름처럼 입구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았다.
동굴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사숙께 배운 대로 오감을 열고 주변의 기척을 탐색했다. 바위틈 사이로 스미는 바람 소리, 멀리서 우는 산새 소리,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어둠이 나를 삼켰다. 한 손에 횃불을 들고 좁은 통로를 따라 전진했다. 바위벽에서 물이 스며 나와 발밑이 질척거렸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졌고, 어느 순간 꽤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바위 위에 놓인 석함(石函). 돌로 만든 작은 함이었다. 세월의 풍화를 견뎌낸 듯 표면이 거칠었지만, 뚜껑 위에 깊이 새겨진 한 글자만은 선명했다.
天(천).
하늘 천. 천잔검보의 '천'자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석함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낡은 양피지 한 장이 접혀 있었고, 그 위에 빼곡하게 적힌 글자들이 보였다. 횃불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무공의 초식과 기의 흐름을 설명하는 도해가 그려져 있었다.
첫 번째 조각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사숙께서 삼십 년간 지켜온 천잔검보의 첫 번째 조각을 내 손으로 직접 확보한 것이다.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품속에 넣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거기 서라."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몸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옷에는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흑사맹이었다.
"그 비급 조각을 내놓아라. 순순히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선두에 선 사내가 칼을 빼어 들었다. 그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적어도 나보다 한두 수는 위인 듯했다. 나머지 둘도 각각 무기를 꺼내 들며 나를 에워쌌다.
좁은 동굴 안에서의 싸움. 불리했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 조각을 빼앗기면 사숙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나는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오너라."
첫 번째 사내가 달려들었다. 그의 검이 독사처럼 구불구불한 궤적을 그리며 내 목을 노렸다. 사파 특유의 음독한 검법이었다. 나는 남궁가의 기본 초식으로 그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쇳소리가 동굴 안에서 메아리쳤다.
두 번째, 세 번째 사내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셋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했지만, 오히려 좁은 지형이 그들의 협공을 방해했다. 한 번에 하나씩만 상대하면 됐다.
사숙께서 가르쳐주신 보법을 펼쳤다. 물 흐르듯 미끄러지며 벽을 등지고, 정면에서 오는 적만 상대했다. 첫 번째 사내의 검을 탄 뒤 빈틈을 파고들어 어깨를 베었다. 그가 비틀거리는 사이, 두 번째 사내의 급소를 노려 일격을 가했다.
세 번째 사내는 동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검을 뻗어 그의 손목을 쳤고, 그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 이놈이..."
세 번째 사내가 이를 악물며 뒷걸음질 쳤다.
"혈야단(血夜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기억해라!"
혈야단. 사숙께서 말씀하신 적무현의 직속 수하. 흑사맹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 혈야단의 이름을 내세우다니, 이 둘은 어떤 관계인가? 사내는 품에서 연막탄을 꺼내 바닥에 내리쳤고, 자욱한 연기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기가 가신 뒤, 나는 쓰러진 두 사내를 살폈다.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들의 품을 뒤져보았으나 신원을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의 손목 안쪽에 핏빛 달 문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흑사맹의 표식은 뱀이었는데, 이 핏빛 달은 혈야단의 표식인가? 겉옷은 흑사맹이되 진짜 정체는 혈야단 — 흑사맹이 혈야단의 위장막이거나, 혈야단이 흑사맹에 침투해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무현의 손이 이미 이곳까지 뻗어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동굴을 빠져나와 산길을 내려오며, 나는 품속의 양피지를 확인했다. 첫 번째 조각은 무사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흑사맹의 탈을 쓴 혈야단, 그리고 그 배후의 적무현. 비급을 둘러싼 어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넓었다.
서늘한 것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처음에는 밤바람 탓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나는 개인의 원한을 쫓고 있다고 믿었다. 적무현을 찾아내고, 빼앗긴 것을 되찾고, 그것으로 끝이라고. 그러나 흑사맹 뒤에 혈야단이 있고, 그 뒤에 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작은 문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끝이 가늠되지 않는 어둠이었다. 복수라는 이름의 작은 불씨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밤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객잔으로 돌아가는 길, 달빛 아래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그림자 위로 또 다른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사숙께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비급의 조각뿐만 아니라, 강호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