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천잔검보

제4장 삽화
운심사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남궁철이 나를 불렀다. 용문객잔의 일층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적였으나, 남궁철은 평소와 달리 이층의 밀실로 나를 안내했다. 좁은 방 안에는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만이 놓여 있었고, 창문은 두꺼운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촛불 하나가 탁자 위에서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에 드리우고 있었다. 남궁철의 표정이 무거웠다. 평소의 호방한 웃음기가 사라지고, 입가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마치 오래 닫아두었던 상자를 열어야 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남궁철은 점소이가 가져온 찻주전자에서 찻잔에 차를 따른 뒤, 잔을 천천히 돌려 향을 맡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향기를 음미하는 것이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는데, 뜻밖에도 무거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네, 혹시 법연 스님 법문 듣다가 졸지는 않았겠지?" 갑작스러운 농담에 눈을 깜빡이자, 남궁철이 허허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일부러 분위기를 풀어보려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입가의 웃음기가 사라지고,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법연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이제 들려줄 이야기가 있네." 촛불이 흔들려 그의 얼굴에 명암이 교차했다. "자네 아버지 진무영에 대한 이야기일세." --- 남궁철의 이야기는 삼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 나와 자네 아버지, 그리고 적무현(赤無玄)이라는 자. 적무현은 나와 함께 무예를 익힌 벗이자, 자네 아버지 무영과도 깊은 인연이 있었던 사내였네." 적무현.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남궁철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분노, 슬픔, 그리움, 그리고 후회. 그 모든 것이 뒤엉킨 채 촛불에 비쳐 일렁였다. "셋이서 함께 수련하며 기를 나누었지. 적무현은 권법에 뛰어났으나 검도 곧잘 익혔네. 무영과 적무현은 형제처럼 지냈고. 셋이 함께한 날들은 — 최고의 시절이었네." 남궁철의 눈빛이 먼 과거를 더듬었다. "그때의 적무현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네. 의리 있고, 용감하고, 동생 같은 후배들을 누구보다 아끼는 사람이었지. 무영보다 한 살 위였으나, 전투에서는 언제나 가장 앞장서는 사내였네." 남궁철이 문득 쓸쓸하게 웃었다. "그 녀석이 처음 왔을 때 일이 생각나는구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지.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적무현이 품에 뭔가를 안고 오더군. 봤더니 길에서 주운 젖은 새끼 고양이였네. 제 몸도 흠뻑 젖은 주제에 고양이만 마른 천으로 감싸 안고서, 사부에게 혼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끝내 놓지 못하더군. 그런 녀석이었네." 남궁철의 목소리가 잠깐 잦아들었다. 그 침묵 속에, 한때 선했던 사람이 어째서 변해버렸는지에 대한 깊은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내 물음에 남궁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천잔검보(天殘劍譜)." 그 네 글자가 방 안의 공기를 바꾸어놓았다. 남궁철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지고, 무의식중에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느껴졌다. "천잔검보라 함은...?" "검과 기를 합일시키는 절세의 무공이 담긴 비급(秘笈)이네." 남궁철이 찻잔을 손가락 끝으로 돌렸다. 찻물이 잔 가장자리에 부딪혀 작은 원을 그렸다. 이윽고 잔을 내려놓고,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렸다. 검의 형상이었다. "보통의 검법은 검을 휘두르는 기술에 불과하네. 보통의 기공은 체내의 기를 다스리는 수련에 불과하고." 말을 끊고 한 박자 쉬었다. "그러나 천잔검보는 이 둘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비법이 담겨 있지. 검기(劍氣)를 실체화하여 검 없이도 검을 쓸 수 있고, 기 없이도 기를 부릴 수 있는... 말 그대로 검과 기의 완전한 합일(合一)이라네." 나는 숨을 삼켰다. 검과 기의 합일이라니. 그것은 무협 전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가. "삼십 년 전, 우리 셋은 우연히 이 비급의 존재를 알게 되었네. 폐허가 된 옛 문파의 터에서 발견한 것이지. 봉인된 석실(石室) 안에 천잔검보가 잠들어 있었네." 남궁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비급의 내용은 너무 위험했네. 한 사람이 독점하면 그 힘에 취해 반드시 화를 부를 것이었지. 우리 셋은 의논 끝에 비급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 각자 하나씩 보관하기로 했네." "세 조각으로..." "그렇네. 첫 번째 조각은 내가 좁은동굴 깊은 곳의 석함에 숨겼고, 두 번째 조각은 자네 아버지 무영이 운심사의 법연 스님에게 맡겼네. 세 번째 조각은 적무현이 청해표국의 곽표두에게 위탁했지." 남궁철이 찻잔을 들었다가, 마시지 않고 다시 내려놓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네. 셋 중 누구도 단독으로 비급을 완성할 수 없게 만들면, 적어도 탐욕으로 인한 비극은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하지만 적무현이 변했네." 남궁철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네. 처음에는 사소한 변화였지. 수련에 더 집착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무공을 탐하는 눈빛이 생기고, 동문의 정보다 힘의 논리를 앞세우기 시작했네." 남궁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장막 틈새로 복건성의 밤하늘이 보였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어느 날 밤, 적무현이 나를 찾아왔네. 그리고 말했지." 남궁철이 뒤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적무현'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의 숨이 한 박자 흔들렸다. 호흡을 가다듬고서야 다음 말이 나왔다. "'남궁, 천잔검보를 합쳐서 수련하면 우리 셋이 천하를 호령할 수 있소. 왜 이 힘을 썩히고 있는 거요?'" 남궁철이 잠시 말을 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무현의 눈이 평소와 다르더군. 탐욕에 물든 눈이었네." "거절하셨습니까?" "당연히 거절했지. 그랬더니 적무현이 웃더군. 차갑게." 남궁철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의 어깨가 살짝 처져 있었다. 팔성의 고수의 어깨가. "그날 밤, 적무현은 무영을 습격했네." 심장이 얼어붙었다. "자네 아버지는 중상을 입고 간신히 도망쳤지. 적무현은 무영이 가진 두 번째 조각의 위치를 알아내려 했던 것이네. 하지만 무영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네. 그 대가로..." 남궁철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이를 악무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다. 나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왜 그토록 쇠약해져 있었는지. 왜 강호를 떠나 시골 마을에 숨어 살았는지. 왜 마지막 순간에 '복건성, 용문객잔, 남궁'이라는 세 마디만 남겼는지. 아버지는 적무현의 습격으로 입은 내상이 치유되지 않아,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무영은 자네를 지키기 위해 강호를 떠났네. 적무현이 자네의 존재를 알면 자네마저 위험해질 것이었으니까." 남궁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이 사람이 삼십 년간 얼마나 큰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벗을 지키지 못한 자의 짐. "미안하네." 남궁철이 나직이 말했다. 그 두 글자에 삼십 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적무현. 사부의 옛 벗이자, 아버지와 형제처럼 지냈던 자. 그 인연을 배신하고, 아버지의 삶을 파괴한 자. 그러나 분노에 사로잡히기 전에, 법연 스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되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 그래서 적무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모르네." 남궁철이 고개를 저었다. "적무현은 그 뒤로 자취를 감추었네. 다만 최근 들어 복건성 주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네. 혈야단(血夜團)이라는 조직이 복건성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데, 이것이 적무현의 직속 수하인 것으로 보이네." 남궁철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적무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네. 삼십 년 전에 실패한 일을 다시 시도하려는 것이지. 천잔검보의 세 조각을 모두 손에 넣으려는 것일세." "그렇다면 좁은동굴에 숨겨둔 첫 번째 조각은...!" "아직 안전하네. 그러나 언제까지 안전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 남궁철이 품에서 작은 옥패(玉牌)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초록빛 옥에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내가 자네에게 주는 신표(信標)일세. 연월향이나 법연 스님은 이미 만나봤겠지만, 이 옥패가 있어야 비로소 속내를 꺼내 보일 것이네. 청해표국의 곽표두도 마찬가지일세. 옥패를 보면 그들은 자네를 진정으로 신뢰할 것이네." 나는 옥패를 받아들었다. 작고 차가운 옥이 손안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전했다. "자네에게 이런 짐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네." 남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에 선 그의 뒷모습이 촛불에 비쳐 길게 늘어졌다. "하지만 자네는 무영의 아들이고, 이 인연을 피할 수 없네. 적무현은 자네의 존재를 아직 모르겠지만, 조만간 알게 될 것이네. 그 전에 자네가 충분히 강해져야 하네." "저는..." 입을 열었으나,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일성에 막 도달한 초심자가 천잔검보니 혈야단이니 하는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두려운 게 당연하네." 내 마음을 읽은 듯 남궁철이 말했다. 그가 돌아서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이상한 따스함이 있었다. "하지만 자네 아버지도 처음에는 자네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떠돌이 청년이었네. 그런 무영이 나중에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고수가 되었지.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네." 남궁철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 하늘 끝에서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객잔의 창문이 덜컹거렸다. 그리고 남궁철이 낮게 중얼거렸다. **"폭풍이 오고 있네."** 그 한마디에 담긴 것은 단순한 날씨 예보가 아니었다. 삼십 년간 봉인해두었던 과거가 다시 풀려나오고 있다는 경고. 적무현이라는 폭풍이 복건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전조. 나는 옥패를 가슴에 품었다. 차가운 옥이 체온을 받아 서서히 따뜻해졌다. 밀실을 나서려는데, 남궁철이 등 뒤에서 말했다. "아, 방에 올라가 보게. 점소이한테 야참 좀 갖다 놓으라고 했으니." 무심한 말투였으나, 방에 올라가 보니 탁자 위에 따뜻한 죽 한 그릇과 찐빵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점소이가 가져다 놓았다고 하기엔 그릇 옆에 놓인 수건 접는 방식이 너무 정갈했다. 이 사람은 늘 이랬다. 거친 말 뒤에 세심함을 숨기고, 제자에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 --- 그날 밤, 나는 객잔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밖에서는 정말로 폭풍이 몰려오는 듯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 간판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밤새 이어졌다. 이불 속에서 옥패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촛불에 비친 용 문양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천잔검보. 검과 기의 합일. 세 조각으로 나뉜 절세의 비급. 첫 번째 조각은 좁은동굴에, 두 번째 조각은 운심사에, 세 번째 조각은 청해표국에. 그리고 그 비급을 독차지하려는 적무현. 아버지를 배신하고, 아버지의 삶을 빼앗은 자. 나도 모르게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주먹을 벽에 가져다 대고, 이마를 주먹 위에 얹었다. 거친 회벽의 감촉이 이마에 닿았다. 주먹이 떨렸다. 아버지의 거친 기침 소리가, 억지로 짓던 웃음이, 국수를 끓여주시던 갈라진 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이 적무현이라니. 한참을 벽에 기댄 채 서 있다가, 다시 이불 위에 쓰러졌다. 허리춤에서 아버지의 단검을 꺼내 쥐었다. 닳은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뒤척였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분노도 슬픔도 가시지 않았다. 다만 단검을 쥐고 있으면, 아버지가 내 곁에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친 감정의 파도가 서서히 잦아들며, 그 아래에서 단단한 무엇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먹을 쥐었다. 분노가 아니라 결의였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지킨 것, 남궁철이 삼십 년간 지켜온 것, 법연 스님이 과거를 봉인하며 지키고 있는 것. 그것을 이제 나도 함께 지켜야 했다. 검은 지키기 위해 드는 것이지, 빼앗기 위해 드는 것이 아니다.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법연 스님의 그 말이 왜 그토록 무겁게 느껴졌는지. 그것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천잔검보를 둘러싼 비극의 핵심을 관통하는 진리였다. 적무현은 빼앗기 위해 검을 들었고, 아버지는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 나는 어느 쪽인가.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창밖의 바람이 잠시 멈추었다. 먹구름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와 방 안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옥패의 용 문양이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폭풍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떠돌이가 아니었다. 복건성이라는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한 그루의 어린 나무.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뿌리가 깊으면 쓰러지지 않는 법이다. 나는 옥패를 다시 품에 넣고,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수련이 시작될 것이다. 비급의 조각을 지키고, 아버지의 원수와 마주할 그날을 위해.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발아래 땅은 단단했다. 용문객잔의 밤이 깊어가고, 복건성 위로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졌다. 폭풍 전야(前夜)의 고요 속에서, 나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날, 남궁철 사숙께서 거처를 옮기자고 하셨다. 복건성 일대의 정보가 모이는 신춘시장(新春市場) 근처 객잔이 강호의 동향을 살피기에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사흘 뒤, 우리는 신춘시장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