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운심사의 가르침

제3장 삽화
운심사(雲心寺)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했다. 복건성 외곽을 벗어나 산자락을 따라 오르는 오솔길은 울창한 대나무숲 사이로 나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댓잎이 서로 부딪쳐 찰랑찰랑 소리를 냈고, 그 사이로 산새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발밑의 돌계단은 이끼가 끼어 미끄러웠으나, 그 오래된 돌 하나하나에 수백 년의 세월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대나무숲이 끝나고 시야가 활짝 열렸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고찰(古刹)이 눈앞에 나타났다. 운심사. 회색 기와지붕이 산안개 속에 잠겨 있었고, 대웅전 처마 끝에 달린 풍경(風磬)이 바람에 흔들리며 청아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산문(山門) 양편에 서 있는 돌사자상은 세월의 풍화로 얼굴이 흐릿해졌으나, 여전히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절 마당에는 연꽃이 핀 작은 연못이 있었고, 수면 위로 낙엽 몇 잎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순간,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복건성의 번잡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난 듯한 적막이 온몸을 감쌌다. 호흡이 깊어지고, 뒤숭숭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산문 안쪽에서 젊은 행자(行者)가 나를 맞이했다. 운청(雲靑)이라는 이름의 새내기 행자였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으나 머리를 빡빡 깎고 승복을 입은 모습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외부인이시군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남궁철 대협과 백인현 선생의 소개로 법연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운청의 눈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안내했다. "스님께서 대웅전에서 참선 중이십니다. 따라오시지요." --- 대웅전 안은 향 연기로 자욱했다. 불상 앞에서 한 노승(老僧)이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회색 승복에 둥근 수염, 깊고 맑은 눈을 가진 노승이었다. 자비롭고 담담한 인상이나, 눈 깊은 곳에는 오랜 세월의 참회가 엷은 안개처럼 서려 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시골 절의 주지스님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궁철에게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압도감이었다. 남궁철의 기세가 깊은 호수 같은 것이었다면, 이 노승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허공(虛空)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듯하면서도 모든 것을 품고 있는, 텅 빈 하늘 같은 존재감.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무아미타불." 법연(法然) 스님이 눈을 떴다. 그 맑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을 때, 깊은 곳에 서린 참회의 안개 너머로 따스한 빛이 비쳤다. "백인현의 소개로 왔다고 하는군. 부처님의 인연이 또 하나 찾아왔구려." 법연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승복 자락이 살랑거렸는데, 그 안에 감추어진 근골이 얼핏 비쳤다. 마른 몸이었으나, 그 마른 몸에 실린 힘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었다. 스님은 나를 데리고 절 뒤편의 대나무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 한켠에 차탁이 놓여 있었고, 운청이 미리 차를 준비해 두었다. 스님이 찻잔에 손가락 끝을 대고 잠시 가만히 있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덜 식었구먼." 운청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법연 스님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다렸다. 차 한 잔의 온도에도 저토록 까다로운 감각. 보통 수도승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정원 너머 대나무숲에서 산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법연 스님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자비롭던 눈이 찰나 사이에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전장에서 적의 기척을 가늠하는 무인의 눈빛이었다. 한 박자 뒤에야 스님은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수십 년의 참선에도 지워지지 않는 무인의 본능이 고개를 내민 것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찻잔을 들어올리는 손등에 오래된 칼흔이 빛나고 있었고, 승복 소매 끝으로 드러난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무기를 잡아 생긴 굳은살이 두텁게 박혀 있었다. 경전을 넘기는 손이 아니라, 한때 전장에서 수많은 정파 무인과 맞서 싸웠던 손이었다. 스님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말이 없었다. 나도 감히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절의 고요함 속에서 풍경 소리만 몇 번 울렸다. 차를 내려놓은 뒤, 스님이 절 뒤편 정원을 거닐자고 했다. 석등 사이로 난 돌길을 나란히 걸었다. 스님은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절의 역사, 정원에 심은 나무의 이름, 오늘 아침 예불 때 외운 경전 구절. 무림과는 거리가 먼, 사찰의 일상적인 이야기뿐이었다.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스님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연꽃이 진흙 위로 고고하게 피어 있었다. 붉은 꽃잎이 석양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연꽃은 좋아하시나?" "아름답습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되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이 연꽃이지." 스님이 연꽃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사람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구먼." 가벼운 말투였으나 어딘가 무거웠다. 이 노승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첫 만남에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연꽃을 바라보는 스님의 눈에 잠깐 스친 그늘이 인상에 남았다. "오늘은 늦었으니 객방에서 쉬게. 내일부터 절 일을 도우며 며칠 머물러 보게나." --- 다음 날 아침부터 절 생활이 시작되었다. 운심사의 아침은 경건했다. 새벽 예불의 목탁 소리가 산 전체에 울려 퍼지고, 스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하루를 시작했다. 운청이 마당을 쓸고, 묘장(妙藏)이라는 건장한 수호승이 산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법연 스님은 특별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다만 "며칠 머물며 절 일을 도와보게"라고만 했다. 수련도, 무공 이야기도 아닌, 그저 절의 잡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의아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남의 절에 머물며 가르침을 구하는 처지에 조급함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둘째 날 새벽, 예불이 끝난 뒤 마당을 쓸고 있는데 산문 쪽에서 물동이를 어깨에 걸고 내려가는 운청의 뒷모습이 보였다. 혼자서 무거운 물동이 두 개를 지고 가는 것이 안쓰러워 저도 모르게 따라갔다. "저도 하나 들겠습니다." 운청이 돌아보며 잠깐 눈을 깜빡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따라온 것이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이내 물동이 하나를 내 어깨에 걸어주며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운심사의 식수는 절 아래 삼백 걸음쯤 내려간 곳에 있는 석간수(石間水)에서 길어왔다. 산비탈의 바위틈 사이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이었다. 이른 새벽의 산길은 안개에 젖어 있었다. 돌계단 위로 이슬이 맺혀 한 발짝 한 발짝이 조심스러웠다. 운청은 익숙한 걸음으로 거침없이 내려갔으나, 나는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샘에 도착해 물동이를 채우는 동안, 운청이 말없이 물을 뜨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행자 생활이 길지 않다고 했는데, 이런 잔일 하나하나에서 수련의 흔적이 묻어났다. 물동이를 어깨에 걸고 다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계단 중턱에서 작은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허리가 굽은 노파 한 분이 이끼 낀 돌계단에서 미끄러져 주저앉아 있었다. 새벽 예불을 드리러 올라오던 길인 모양이었다. 회색 무명옷에 낡은 염주를 손에 감고 있었는데, 발목을 잡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달려갔다. 운청도 물동이를 계단 한쪽에 세워두고 재빠르게 다가왔다. "할머니, 괜찮으십니까?" 노파의 발목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접질린 모양이었다. 노파가 이를 악물며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아이고, 늙으니 돌부리도 못 피하는구나..." 운청이 아무 말 없이 노파의 한쪽 팔을 어깨에 걸었다. 나도 반대쪽 팔을 받쳤다. 노파는 연신 미안하다며 손사래를 쳤으나, 우리는 천천히 한 계단 한 계단 노파를 부축하며 올랐다. 돌계단이 가팔라질 때마다 노파가 아픈 발목 탓에 신음을 흘렸고, 그때마다 운청이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대웅전까지 올라가는 데 평소의 곱절은 걸렸을 것이다. 대웅전 처마 밑에 노파를 모셔다 앉히자, 노파가 두 손을 모아 연신 합장했다. "고맙다, 고마워. 부처님이 보살을 보내주셨구나." 운청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보살이라는 말이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다시 계단을 내려가 물동이를 가지러 갔다. 운청도 뒤따라왔다. 나는 몰랐지만, 대웅전 처마 그늘에서 법연 스님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노파에게 달려가는 내 모습을, 스님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물동이를 다시 어깨에 걸고 올라가는 길, 운청이 불쑥 입을 열었다. "시주는 물동이 드는 자세가 엉망입니다." "뭐?" "어깨만으로 버티니까 금방 지치는 것입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무게를 단전 쪽으로 실어야 합니다." 뜻밖의 조언이었다. 운청의 말대로 자세를 고치니, 어깨의 부담이 한결 줄었다. "네 말이 맞네. 고맙다." "... 별것 아닙니다." 운청이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보았으나, 못 본 척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발밑에서 자갈 밟히는 소리가 리듬처럼 이어졌다. 서먹했던 공기가 조금 달라진 것을 느꼈다. 같이 물을 긷고, 같이 노파를 부축하고, 같이 계단을 오르는 것.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작은 일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법이었다. 절 마당에 도착하자 운청이 물동이를 부엌에 내려놓으며 돌아보았다. 잠깐 뭔가 말하려다 망설이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색한 인사였으나, 서먹했던 거리가 한 뼘쯤 줄어든 느낌이었다. 둘째 날에도 나는 절 일을 도왔다. 마당을 쓸고, 물을 긷고, 부엌에서 공양을 준비하는 일을 거들었다. 법연 스님은 여전히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만 나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좌선 시간에 대웅전 한쪽에 앉아 스님들을 따라 호흡을 맞추어보았는데, 마치고 눈을 떠보니 법연 스님이 문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는 것이 보였다. 그날 오후, 절 앞 나무에 매달린 벌집에서 벌들이 쏟아져 나와 마당에서 놀던 마을 아이들이 놀라 흩어지는 일이 있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어들어 미처 달아나지 못한 어린아이를 안아 올려 벌 떼에서 벗어나게 했다. 팔과 목덜미에 벌침을 몇 군데 맞았으나 대수롭지 않았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자 그제야 따끔한 통증이 밀려왔다. 운청이 달려와 벌침을 빼주는 사이, 대웅전 처마 아래에서 법연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아주 미세한 동작이었으나, 무언가를 확인했다는 듯한 끄덕임이었다. 사흘째 되던 아침이었다. 새벽 예불 후 마당을 쓸고 있는데, 법연 스님이 대웅전에서 나오시며 나를 불렀다. "차 한 잔 하겠나." 차탁에 마주 앉자, 스님이 차를 따르며 말했다. "며칠 절에 있으면서 고생이 많았네. 물도 길어주고, 마당도 쓸어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으나, 스님이 다 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괜히 쑥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절 일을 도운 것뿐입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네." 스님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자네에게 전해줄 가르침이 있네." 스님이 찻잔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내려놓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풍경 소리가 한 번 울렸다. "남궁철의 소개로 왔다 했지. 그분이 자네를 이리 보낸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네." 나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스님이 잠시 차를 마시다가, 불쑥 물었다.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거창한 답을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눈앞의 노승이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남기신 말의 뜻을 찾고 싶습니다." 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찻잔이 비었다.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남궁철이 자네에게 호흡법을 가르쳐달라 부탁했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해보겠네." 법연 스님은 직접 무공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나, 기의 운용법과 호흡법을 알려주었다. 운기조식(運氣調息)이라 불리는 이 수련법은 체내의 기를 순환시켜 내상을 치료하고 내공을 축적하는 기초 중의 기초였다. "내공은 무공의 뿌리네. 나무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늘 높이 자라듯, 내공이 깊어야 어떤 무공이든 제대로 펼칠 수 있지." --- 그 후 며칠간 운심사에서 수련이 계속되었다. 새벽마다 대웅전 앞에서 좌선을 하고, 오전에는 산을 오르내리며 체력을 단련하고, 오후에는 운기조식을 수련했다. 밤에는 법연 스님의 법문(法文)을 들으며 마음을 닦았다. 그러나 기의 흐름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배운 도인술로 어렴풋이 느끼던 단전의 온기를 붙잡으려 했으나, 매번 안개 속에서 실을 잡으려는 것처럼 허사였다. 호흡을 가다듬고, 의식을 단전에 집중하고, 임맥을 따라 기를 올려보려 해도 어느 지점에서 막혀버렸다. 수련 후 법연 스님에게 여쭈면 스님은 담담하게 "급하면 오히려 멀어지네"라고만 했다. 넷째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방문 앞에 보자기에 싸인 찐빵과 약초탕이 놓여 있었다. 운청에게 물으니 고개를 갸웃하며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보자기 매듭이 남궁철 특유의 투박한 방식이었다. 산 아래에서 이른 새벽에 이 험한 길을 올라와 음식을 놓고 갔을 그 모습을 떠올리니, 거칠게 "알아서 잘해라"고만 하시던 그분의 뒷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닷새째 되던 낮이었다. 오후 수련을 마치고 절 뒤편의 차탁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는데, 산문 쪽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남궁철이었다. 운청이 차를 내오자 남궁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찻잔만 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수련은 되어가느냐." "소주천까지는 아직 멀지만, 법연 스님의 가르침 덕에 기의 흐름이 조금씩 느껴집니다." 남궁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내 손을 보았다. 정확히는, 검을 잡는 손의 모양을 보고 있었다. "잠깐. 검을 뽑아봐라." 갑작스러운 말에 검을 뽑아 기본 자세를 취했다. 남궁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내 손목의 각도와 발끝의 방향을 번갈아 살폈다. "누군가에게 검의 기초를 배운 적이 있느냐?" 뜻밖의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고향을 떠나 떠돌 때, 잠시 만난 선배가 있었습니다. 보름 남짓 함께 길을 걸었는데, 그 사이에 검 잡는 법과 기본 보법을 몇 가지 알려주었습니다. 이름은... 한(韓)씨 성을 쓰셨는데, 전체 이름은 끝내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남궁철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가 풀렸다.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 듯했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그래... 그 사람이 누구든, 기본은 제대로 가르쳤구나." 남궁철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더 해라" 정도의 말을 던지고 일어났을 텐데, 그날따라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더니, 불쑥 물었다. "네 아버지 이야기를 더 해보거라." 뜻밖의 말이었다. 남궁철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적이 없었다. 항상 "때가 되면 알게 된다"며 입을 닫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찻잔을 돌리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요리를 잘 못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남궁철의 눈썹이 꿈틀했다. 기세등등한 무인의 이야기를 기대했는지,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직접 밥을 해주셨는데. 밥은 매번 태우고, 국은 짜거나 싱거운 것밖에 못 만드셨죠. 그런데 딱 하나, 국수만은 제법이셨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허름한 부엌에서 솥 앞에 쭈그려 앉아 면발을 삶고 있던 아버지의 뒷모습. 넓은 어깨가 좁은 부엌에 어울리지 않았고, 검을 잡던 손이 서툴게 국자를 저었다. 하지만 국수를 건져 그릇에 담아줄 때의 표정만큼은, 세상 어떤 요리사보다도 정성스러웠다. "한번은 제가 열병으로 며칠을 앓아누운 적이 있었습니다. 물도 제대로 못 넘기고 있었는데, 새벽에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머리맡에 국수 한 그릇을 놓아두셨더군요. 면발이 불어서 엉겨 있었지만... 그때 그 국수가 제 생에 가장 맛있는 국수였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목이 메었다. 고개를 숙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남궁철이 아무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찻잔을 멈추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산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산 너머 어딘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향해 있었다. "무영이... 네게 국수를 끓여줬다고?" 그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녀석이..." 남궁철이 말끝을 흐렸다. 투박한 손등으로 눈 언저리를 한 번 문질렀다. 아주 빠르게,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을.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대나무숲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댓잎을 흔들었고, 그 찰랑거리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내가 알던 진무영은 국수는커녕 물 한 그릇도 제 손으로 떠본 적 없는 놈이었다." 남궁철이 낮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즐거움보다 아련함이 더 짙었다.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던 젊은 시절의 동문이 아니라, 아들을 위해 서투른 국수를 끓이던 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변하는 거구나. 아니... 그것이 본래 그 녀석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르지." 남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투박했지만, 처음으로 그 손길에서 진무영에 대한 그리움이, 그리고 그 그리움이 고스란히 나에게 옮겨진 듯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수련 열심히 해라. 네 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것이 무엇인지, 언젠가 네가 직접 깨닫게 될 것이다." 남궁철이 돌아서서 산길을 내려갔다. 나는 그 넓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사람이 나를 돌보는 이유가 단순히 "옛 동문의 아들이니까"가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 사람에게 나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벗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슬픔이, 어느새 나를 향한 진심이 되어 있었다. 찻잔에 남은 찌꺼기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남궁철 대협의 무뚝뚝함 아래에 이런 감정이 숨어 있었다면, 지금까지 내게 건넨 거친 말들도 모두 다르게 들릴 것이었다. 그날 밤이었다. 여느 때처럼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단전에서 기를 끌어올려 임맥을 타고 올리려 했으나, 또다시 같은 지점에서 막혀버렸다. 가슴 한복판, 전중혈(膻中穴) 부근이었다. 며칠째 이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의식을 집중해보았으나, 기운이 벽에 부딪혀 흩어지는 감각만 되풀이되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법연 스님이었다. "막힌 곳이 전중혈이군." 스님이 조용히 내 등 뒤에 앉았다. "자네의 단전에는 본래 잠들어 있던 기운이 있네. 아마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겠지. 그 기운이 오히려 관문을 막고 있는 것이네. 내가 물꼬만 터줄 테니, 호흡을 멈추지 말게." 스님의 손가락이 등의 한 점에 가볍게 닿았다. 그 순간, 따뜻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체내로 흘러들어왔다. 막혀 있던 전중혈이 뚫리면서, 기가 단숨에 임맥을 타고 올라가 백회(百會)에 이르고, 다시 독맥(督脈)을 타고 내려와 단전으로 돌아왔다. 소주천(小周天). 기공 수련의 첫 관문이었다. 온몸이 마치 뜨거운 온천에 담근 것처럼 훈훈해졌다. 손끝에서 미세한 기운이 감돌았고, 감각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예민해졌다. 바람 소리 하나, 벌레 울음 하나가 모두 선명하게 들렸다. 법연 스님이 손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꼬가 트였구먼. 이제부터는 자네 스스로 흐름을 이어가야 하네." 나는 눈을 뜨고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하던 무언가가, 손끝에서 미세하게 감돌고 있었다. 이것이 기(氣)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몸 안에서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법연 스님이 합장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까까지 엄숙하기만 했던 그의 얼굴에 기쁨이 어려 있었다. 그러더니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허, 이 속도라면 소주천에 석 달도 안 걸렸겠구먼. 내가 처음 기를 깨달았을 때는 사흘 동안 코피만 쏟았는데." 순간 스님의 말투가 달라졌다. 법문을 읊조리던 고승이 아니라, 젊은 시절의 거친 성정이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이었다.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간 그 웃음에는 수도승의 자비 대신 무인의 호쾌함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한순간이었다. 스님은 이내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엄숙한 표정을 되찾았다. "자네의 뿌리가 범상치 않구먼. 진무영의 아들답네." "스님께서도 제 아버지를 아십니까?" "알고 있네." 스님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다 삼킨 듯한 침묵이었다. "자네의 아버지와 나 사이에도 인연이 있네. 더 알고 싶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네." 남궁철과 같은 말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으나, 억지로 꺼내봤자 답을 얻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네가 충분히 강해졌을 때, 모든 것을 알려주겠네. 지금 필요한 것은 인내와 수련뿐이네." --- 운심사를 떠나는 날 아침, 법연 스님이 산문까지 배웅해주었다. "복건성의 다른 인물들도 만나보게.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자들이니, 분명 배울 것이 있을 것이네." 나는 깊이 절을 올렸다. 스님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몸을 성히 돌보게. 자네만의 길을 찾게나." 산을 내려오며 뒤를 돌아보았다. 운심사의 기와지붕이 아침 안개 속에서 아스라이 보였다. 풍경 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서 들려왔다. 몸 안에서 달라진 무언가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아버지와 남궁철의 관계, 법연 스님과 아버지를 잇는 인연, 그리고 왜 이 모든 것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로 봉인되어 있는지. 산 아래로 복건성의 성곽이 보였다. 아침 햇살 아래 빛나는 그 모습이,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조금 가깝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