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기 전에 눈을 떴다.
객잔 방 안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여명의 빛이 가느다란 금실처럼 바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세수를 하고, 허리춤의 단검 손잡이를 한 번 쓸어본 뒤 보따리를 챙겨 일층으로 내려갔다.
객잔 밖으로 나서니 복건성의 아침 공기가 서늘하게 폐를 채웠다. 어젯밤의 번화함과 달리 이른 시각의 거리는 고요했다. 노점상들이 하나둘 가게를 열고, 물장수가 물통을 끌며 골목을 지나갔다. 할 일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복건성 골목길을 걸으며 거리의 지리를 익혀보기로 했다.
좁은 뒷골목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왼쪽 허리춤이 스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자, 가느다란 손목이 잡혔다. 열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헐렁한 누더기를 걸친 사내아이가 내 허리춤에서 빼내려던 보따리 끈을 쥔 채 얼어붙어 있었다. 눈이 크고 까맣지만, 그 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놔, 놔 줘요!"
아이가 발버둥을 쳤다. 잡은 손목이 너무 가늘어서,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나는 손아귀의 힘을 풀되 놓지는 않았다.
"소매치기를 하면 안 되지. 왜 이러는 거냐?"
아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한참을 버티다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동생이... 동생이 아파요. 열이 엄청 나는데 약을 살 돈이 없어요. 사흘째 물만 먹이고 있는데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요..."
울음섞인 목소리에서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의 손톱 사이에 때가 끼어 있었고, 맨발에는 굳은살과 상처가 가득했다. 나도 부모를 잃고 떠돌던 시절이 있었다. 배고픔에 눈앞이 아른거려도 차마 남의 것에 손을 대지 못해 쓰러질 뻔한 날들. 이 아이에게서 그때의 내가 보였다.
나는 아이의 손목을 놓아주고 눈높이를 맞추어 쪼그려 앉았다.
"동생이 어디 있느냐? 데려가 봐라. 의원을 찾아가 보자. 이 성에 약방이 있을 것이다."
아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관아에 넘기려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걱정 마라. 소매치기한 것은 잊어주마. 대신 동생부터 치료하자."
아이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서서 뛰기 시작했다. 골목 깊숙이, 허물어진 담벼락 뒤에 낡은 거적때기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대여섯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축 늘어져 누워 있었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숨소리가 거칠었고,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여자아이를 등에 업고, 사내아이의 손을 잡아 이끌며 의원을 찾아 나섰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에게 물으니 북서쪽에 청명당이라는 약방이 있다 했다. 등에 업힌 아이가 가벼워서 가슴이 아팠다. 뼈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청명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약재를 분류하던 의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름은 알지 못했다. 다만 온화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고, 등에 업힌 아이를 보더니 말없이 안쪽 침상을 가리켰다. 아이를 눕히자 그가 즉시 맥을 짚고 혀와 눈을 살폈다.
"풍한(風寒)이 폐로 들어간 것이오. 하루만 더 늦었으면 위험했을 것이오."
의원은 약장에서 약재 몇 가지를 꺼내 재빠르게 달이기 시작했다. 감초, 마황, 행인, 석고 ― 손놀림이 물 흐르듯 거침이 없었다. 약탕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진한 약초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사내아이는 침상 옆에 쪼그려 앉아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의원이 식힌 약을 아이의 입에 한 숟갈씩 떠넣었다.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약재를 다루는 손이 유난히 정밀했다. 약초의 양을 재는 손끝에 흔들림이 전혀 없었고, 탕약의 농도를 맞추는 감각이 예사 의원의 것이 아니었다. 한 식경(한 시간)쯤 지나자 여자아이의 숨소리가 조금씩 고르게 잡혔고, 이마의 열도 서서히 내려갔다.
"사흘분의 약을 지어줄 테니, 하루 세 번 빠짐없이 먹여야 하오."
의원이 약봉지를 사내아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이가 약봉지를 받아들고 머뭇거렸다.
"저... 약값은..."
"됐소. 약값은 신경 쓰지 말게."
의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사내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쓸어주었다.
"다만, 다시는 소매치기는 하지 마라. 동생이 나으면 청명당에 와서 심부름이라도 하거라. 그것이 약값이다."
아이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두려움의 눈물이 아니라, 안도의 눈물이었다. 아이가 꾸벅 절을 하고, 동생을 업고 골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청명당을 나서며 의원에게 감사를 전하자, 그가 약상자를 정리하며 조용히 웃었다.
"당신이 데려오지 않았으면 그 아이는 내일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오. 살린 것은 당신이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작은 일이었다. 소매치기를 붙잡고, 아이를 의원에게 데려간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하나의 생명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남궁철이 말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쩌면 이런 작은 일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청명당을 나서 다시 용문객잔으로 돌아왔다. 점심 무렵이었다.
놀랍게도 남궁철은 이미 같은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치 밤새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그가 나를 보더니 가볍게 턱짓했다.
"아침에 청명당의 의원에게서 자네 이야기를 들었네."
뜻밖의 말이었다. 남궁철이 찻잔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새벽부터 아이를 업고 뛰어다녔다고?"
청명당의 의원이 남궁철에게 이야기를 전한 모양이었다. 남궁철의 눈이 나를 훑었다. 평소와 달리 시선이 길었다. 나의 손, 어깨, 발끝을 차례로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아이를 업고 뛴 건 대단한 일이 아닐세. 하지만 의원이 그러더군. '그 청년은 주저하지 않았소. 아이가 남의 아이인데도.' 그게 중요한 거야."
남궁철이 찻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쳤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어젯밤 내내 생각했네. 자네 아버지 무영이와의 인연, 그리고 자네가 이 복건성에 온 이유. 아직 자네에게 말해줄 수 없는 것들이 있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지 — 자네가 이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힘이 필요하네. 그리고 힘은 바른 심성 위에 쌓아야 무너지지 않는다네."
남궁철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자네의 수련을 맡아보겠네. 다만 조건이 있네."
"조건이라 하시면...?"
"수련은 길고 고될 거야. 중간에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떠나도 좋네. 억지로 붙잡지 않겠네. 하지만 시작한 이상 나의 방식을 따라야 하네. 받아들이겠나?"
잠깐 망설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단서를 쥔 유일한 사람이 눈앞에서 수련을 제안하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인연이 어떤 것이었는지, 왜 아버지는 마지막에 이 사람의 이름을 남겼는지 —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이 사람 곁에 있어야 했다. 동시에 경계심도 남아 있었다. 이틀 전까지 모르던 사람이다. 하지만 성문 앞에서 노인의 짐수레를 도울 때 이미 이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고, 아이를 업고 뛸 때 의원이 전해준 이야기가 이 순간까지 이어졌다. 우연이 아니라, 이 사람 나름의 검증이었던 것이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무공의 근본은 체력이네. 아무리 화려한 검법을 익혀도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허사일세."
남궁철이 창밖을 가리켰다. 복건성의 동쪽 성문 너머로 울창한 숲의 윤곽이 보였다.
"작은숲. 복건성 초입에 있는 수련장이라 할 수 있지. 거기서부터 시작하게."
남궁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객잔 구석에 세워둔 긴 보따리를 가져왔다. 천으로 감싼 것을 풀자, 소박하지만 단정한 장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으나 칼날에 기름기가 고르게 먹어 있었고, 검집의 나무결이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다. 오래 쓰이되 잘 관리된 검이었다.
"단검만으로는 한계가 있네. 이것을 가지고 다니게."
나는 두 손으로 검을 받아 들었다. 허리춤의 단검과 함께, 이제 두 자루의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단검은 여전히 아버지의 유품이자 마음의 의지처였고, 이 장검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의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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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숲의 입구에 서자, 나무 사이로 새어 드는 아침 햇살이 초록빛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참새가 짹짹거리며 나뭇가지 위를 뛰어다니고, 풀숲에서는 이름 모를 벌레들의 합창이 들려왔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 속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풀숲이 흔들리더니 회색빛 털뭉치가 튀어나왔다. 들쥐였다. 일반적인 들쥐와 달리 주먹만 한 크기에 빨간 눈이 사나웠다. 강호의 기운을 머금고 자란 짐승은 일반 짐승과는 달랐다.
"찍찍!"
들쥐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발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허리에서 검을 뽑아 본능적으로 내리쳤다. 서툰 일격이었으나 칼끝이 들쥐의 등을 스쳤고, 작은 짐승은 찍 하는 소리와 함께 풀숲으로 튕겨 나갔다. 움직임이 멈추었다.
손이 떨렸다.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짐승이었다. 그런데도 칼끝에 전해진 감촉이 — 살아 있는 것을 가른 그 느낌이 손목을 타고 팔 전체에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검날에 묻은 피는 고작 몇 방울이었으나, 아침 햇살에 검붉게 빛났다. 바람결에 실려 온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다. 배 속이 서늘하게 가라앉으며 위장이 뒤집히는 감각이 밀려왔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풀밭에 손을 짚었다. 위장이 수축하며 신물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토하지는 못했다. 아침에 먹은 것이 없었으므로. 그 대신 자기혐오가 한 줄기 독처럼 속을 태웠다. 고작 들쥐 한 마리를 벤 것뿐인데 이 꼴이라니. 무인이 되겠다고 길을 나선 자가 첫 살생에 무릎을 꿇다니. 그러나 ― 그래도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다음이 있다. 나는 거칠게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지금 쓰러지면 끝이다. 이 정도에 무너지면 강호의 문턱조차 밟을 수 없다. 들쥐가 아니라 사람이 덤비는 날이 온다면, 그때도 이렇게 주저앉을 것인가.
검에 묻은 피를 풀잎으로 닦아냈다. 고작 몇 방울. 그런데 그 몇 방울이 초록 위에 번지는 것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것이 강호다. 작은 짐승 하나에 이렇게 흔들리는 내가, 앞으로 사람과 맞서야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도 이렇게 주저앉을 것인가. 나는 풀잎을 버리고 일어섰다.
그날부터 작은숲이 나의 수련장이 되었다. 매일 아침 숲에 들어가 들짐승들을 상대하고, 해가 기울면 객잔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들었다. 대단한 것은 없었다. 다만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고, 숨을 고르는 것의 반복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숲을 반 바퀴도 돌지 못하고 주저앉았는데, 나흘째부터는 한 바퀴를 쉬지 않고 돌 수 있게 되었다. 단검을 쥐는 손에 굳은살이 잡히기 시작했고, 보따리에서 꺼내 씹는 식은 만두가 산해진미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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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철은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직접 가르치는 일은 드물었고, 대부분은 "다시 해봐라"거나 "자세가 흐트러졌다" 정도의 짧은 말만 던졌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방향을 잡아주었다.
닷새째 되는 아침, 남궁철이 수련 전에 나를 불러 세웠다.
"작은숲은 이제 자네에게 더 가르쳐줄 것이 없네. 숲 너머에 좁은동굴이라는 곳이 있네. 그곳에서 다음 단계를 시작하게."
좁은동굴. 이름만 들어도 작은숲과는 다른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숲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 입구는 바위틈 사이에 숨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살갗을 파고들었고, 발밑에서는 물이 찰랑거렸다. 동굴 벽면에서 이끼가 희미한 인광(燐光)을 내뿜어 완전한 암흑은 아니었지만, 시야는 겨우 서너 발자국 앞까지만 닿았다.
그리고 거미줄이 보였다. 앞서 나간 손이 허공을 휘젓는 순간 끈적한 실이 얼굴에 들러붙었다. 입술과 눈 사이를 가로지르며 살갗을 잡아당기는 그 감촉이 소름끼치게 질겼다. 손등으로 거칠게 뜯어냈지만, 끈끈한 잔여물이 볼 위에 남아 피부를 간질였다. 발밑은 축축했다. 물이 얕게 깔린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질퍽한 소리가 동굴 안쪽으로 울려 퍼졌고, 이끼 사이에서 올라오는 냄새 ― 산(酸)을 닮은, 코점막을 찌르는 매캐한 악취 ― 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사람 팔뚝만 한 독거미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여덟 개의 다리가 느릿느릿 움직이며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독니에서 흘러내리는 초록빛 액체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녹아내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작은숲의 들쥐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남궁철이 말한 '진심으로 맞서라'는 가르침이 떠올랐다.
이를 악물었다.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도인술의 기초, 단전에 기를 모으는 법. 지금까지는 건강 체조 정도로 생각했던 그 호흡법이, 이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들이쉬고, 내쉬고.
기가 단전에서 사지(四肢)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미약하지만 분명한 감각이었다.
내가 먼저 움직였다. 독거미를 향해 뛰어들며 단검을 찔렀다. 독거미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독액을 뿜었고, 나는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했다. 어깨 위로 독액 몇 방울이 튀었다. 옷감이 치직 소리를 내며 살짝 녹았고, 그 아래 피부가 화끈거렸다. 벌에 쏘인 것을 열 배쯤 키운 느낌이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독이 퍼지기 전에 빨리 끝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두 번째 공격. 세 번째 공격. 독거미의 딱딱한 외피에 단검이 튕겨나갔다. 축축한 바닥에 발이 미끄러져 한쪽 무릎이 물웅덩이에 처박혔고, 찬물이 바지를 적시며 살을 깨물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네 번째에 겨우 다리 관절 사이의 약점을 찾아 깊이 찔러넣었다. 독거미가 몸을 떨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독액이 튀었던 어깨가 욱신거리며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급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약을 발라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이겼다.
동굴의 더 깊은 곳은 횃불도 없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독거미 한 마리에 이 꼴인데, 저 안에 무엇이 또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출구를 향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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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서 나와 복건성으로 돌아오는 길, 며칠 전 들렀던 청명당에 다시 발길을 돌렸다. 어깨의 독상은 급한 것이 아니었지만, 내버려두면 좋을 것도 없었다.
청명당에 들어서자 그때의 의원이 나를 알아보았다.
"오, 전에 아이를 데려와 주신 분이시군. 어쩐 일이오?"
독거미에게 당한 어깨를 보이자, 그가 즉시 약초를 달여 상처에 발라주었다. 욱신거리던 어깨가 거짓말처럼 시원해졌다.
"청명당의 백인현(白仁賢)이라 하오."
치료를 하며 의원이 비로소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왔을 때는 급한 환자 때문에 인사를 나눌 겨를이 없었던 것이었다.
"독과 약은 한 끗 차이입니다. 저는... 그 한 끗을 넘어본 사람이에요."
그 말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러나 백인현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고, 나도 더 캐묻지 않았다. 이제 막 안면을 튼 사이에 과거를 파고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의술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오. 그것을 잊어선 안 되오."
백인현이 약상자를 정리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전에 아이를 치료할 때와 같은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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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당을 나서 두 번째로 향한 곳은 병기점이었다. 복건성 상업지구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곳은 갖가지 무기와 장비가 진열된 크고 번화한 가게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 여인이 진열된 검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오, 반갑소. 혹여 자네도 검을 보러 온 것이오?"
여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날렵한 체격의 여검객이었다. 눈빛이 유난히 맑고 깨끗했는데, 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아이처럼 반짝였다.
류화검(柳花劍) 류설아(柳雪兒).
검을 유난히 좋아하여 병기점을 자주 찾는 무림인이라 했다. 그녀는 진열대에서 검 하나를 들더니 검날 위에 검지 하나를 올려 균형점을 찾았다. 손끝이 칼날 위에서 미끄러지듯 옮겨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자, 검이 수평으로 딱 걸렸다. 무게중심을 재는 것이었다. 무심한 동작이었으나 숱한 검을 다뤄본 자만이 할 수 있는 버릇이었다.
그녀는 진열된 검을 하나하나 들어 보이며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편이라 했으나, 검 이야기가 시작되자 물꼬가 트인 듯 말이 끊이질 않았다. 검날의 접은 횟수, 담금질 온도에 따른 탄성의 차이, 검코등이의 기능까지 ― 한번 입을 열면 스스로도 주체를 못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검을 만들 줄도 모르고, 대단한 무공을 가진 것도 아니오. 그저 이 강철의 날이 지닌 매력에 빠져들었을 뿐이지."
그러다 문득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무기라는 것은 단순한 쇳덩이가 아니오. 검은 주인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지."**
그녀가 벽에 걸린 장검 하나를 내려 내게 건넸다. 가볍고 유연한 검이었다. 날이 가늘어 빠른 검법에 적합해 보였다.
"자네처럼 체격이 날렵한 사람에게는 이런 검이 맞을 것이오. 좋은 검을 쓰고 싶거든 먼저 좋은 대장장이를 찾아야 하는 법이지."
류설아가 내 허리춤의 단검을 힐끗 보더니 다시 검날 위에 손가락을 올려 무게중심을 잡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좋은 검이군. 주인이 아깝지만."
칭찬인지 비꼼인지 알 수 없는 한마디였다. 그러나 그 말투에 악의는 없었다. 오히려 검에 대한 솔직한 애정이 묻어 있는, 그녀만의 인사법 같은 것이었다.
류설아가 진열대의 검을 하나 집어 천으로 닦기 시작했다. 팔지도 않을 남의 가게 검을 정성껏 닦는 것이 의아하여 지켜보았는데, 그녀의 손에는 집착이 아니라 기도가 담겨 있었다. 마치 검을 닦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 손끝이 검날 위를 지날 때마다 눈빛이 아득히 먼 곳을 향했다. 무엇이 이 여인을 이토록 검에 묶어두었는지, 그때의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고요한 손길 속에 무거운 사연이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었다.
류설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무기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허리춤의 녹슨 단검이 새삼 초라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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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찾아간 곳은 매화루(梅花樓)였다.
복건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기루라는 명성답게, 삼층 건물 전체가 비단과 등불로 장식되어 있었다. 처마 끝에 매화 가지 모양의 금장식이 달려 있었고, 안에서는 은은한 향 내음과 비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아름다운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연월향(燕月香).
매화루의 간판 기녀라 했다. 나이는 스물 대여섯으로 보였으나, 또랑또랑한 눈빛에는 나이 이상의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어색하게 목례를 하고 남궁철의 이름을 꺼냈다.
"남궁철 대협의 소개로 왔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잠깐 뵙고 싶은 분이 있어서..."
연월향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미소는 그대로였으나, 나를 훑는 시선이 한 순간 날카로워졌다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손님을 맞는 기생의 얼굴 뒤에서, 무언가를 빠르게 판단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분의 소개라면 앉으시지요."
연월향이 차를 내오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 미소가 너무 완벽하여 오히려 경계심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차를 따르며 복건성의 분위기를 이야기해주었다.
"요즘 복건성의 거리가 좀 어수선해요.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간간이 눈에 띄는데, 이전에는 없던 일이에요."
비파를 뜯으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이 여인이 단순한 기생이 아님을 직감했다. 한마디 한마디에 무게가 있었고, 거리의 분위기를 읽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았다.
더 알고 싶었으나, 연월향은 비파 줄을 매만지며 미소로 말을 끊었다.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 다음에 남궁 대협의 소개장을 가져오세요. 그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남의 집에 얹혀사는 처지에 불과한 내게 복건성의 세력 구도를 풀어줄 이유가 없을 터였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었다.
연월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 전에 청명당에 잠깐 들르셨다지요?"
"아이를 데리고 잠깐 들렀습니다만."
"그 의원이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분명 좋은 인연이 될 것입니다."
전에 잠깐 들렀던 청명당. 약재를 다루던 정밀한 손놀림이 떠올랐다. 연월향의 말이 맞다면, 이미 치료를 받은 인연이 있으니 다음에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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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기 전, 나는 복건성을 나서 외곽의 운심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날 사람, 법연 스님.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아직 알지 못했지만, 남궁철도, 백인현도 모두 그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복건성에 도착한 지 일주일 남짓. 작은숲에서 들짐승을 쫓고, 좁은동굴에서 독거미와 싸우고, 사람들을 만나고. 아직 걸음마에 불과했지만, 단검을 쥔 손에는 굳은살이 잡히기 시작했고, 가슴속에는 작지만 확실한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