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건성의 성문이 보이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석양이 성벽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붉은빛이 돌담을 물들이고, 성문 앞에 줄지어 선 행상들의 짐 위로 금빛 먼지가 날렸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바다 내음이 섞여 있었고, 성안에서 흘러나오는 볶음 요리의 기름 냄새와 뒤엉켜 묘한 향취를 만들어냈다.
복건성.
강호의 요충지라 불리는 이 땅에, 나 같은 무명의 떠돌이가 발을 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허리춤에 찬 녹슨 단검 한 자루와 등에 진 낡은 보따리가 내 전 재산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사 년, 열여섯에 고향 마을을 떠나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 나는 줄곧 떠돌아다니기만 했다.
무공이라 할 것도 없었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기초 도인술(導引術)이 고작이었고, 그것마저 체계적인 수련이라기보다는 아침저녁으로 하는 건강 체조에 가까웠다. 강호에 발을 들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열에 들떠 헛소리처럼 내뱉은 말.
"복건성... 용문객잔... 남궁..."
그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아버지는 끝내 알려주지 못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눈을 감았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은 것은 그 세 마디뿐이었다.
복건성. 용문객잔. 남궁.
문득 아버지의 손이 떠올랐다. 거칠고 갈라진 손. 그 손으로 어린 나를 위해 국수를 끓여주시던 날이 있었다. 면을 삶으며 연신 기침을 하시면서도, 돌아보실 때면 언제나 억지로라도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병이 깊어진 마지막 겨울, 장작 타는 소리와 뒤섞이던 그 마른 기침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사 년을 떠돈 끝에 마침내 이곳까지 왔다. 발바닥은 굳은살투성이였고, 심장은 기대와 두려움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성문까지 백 보쯤 남았을 때, 길 한쪽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짐수레 하나가 돌부리에 걸려 옆으로 뒤집혀 있었고, 그 주위로 귤과 감, 잡곡 자루가 흩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수레 곁에 허리가 굽은 노인 하나가 쭈그려 앉아 떨리는 손으로 귤을 주워 담고 있었다. 흰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햇볕에 그을린 주름진 얼굴에는 땀과 먼지가 뒤범벅이었다.
행인들은 바삐 노인 옆을 지나갔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나도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배가 고팠고, 주머니에는 동전 몇 닢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발이 멈추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틀림없이 "가서 도와줘라"고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나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노인 곁에 무릎을 꿇었다. 수레를 일으키려 했으나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어깨를 수레 밑에 대고 온 힘을 주어 밀어올리자, 삐걱 소리를 내며 수레가 간신히 바로 섰다. 그 사이 흩어진 귤과 감을 하나하나 주워 자루에 담았다. 노란 귤이 손 안에서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빈속에 침이 고였으나, 나는 단 하나도 몰래 챙기지 않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것에 손대는 순간,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되는 것이었다. 떠돌이로 사 년을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배고픔보다 부끄러움이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잡곡 자루까지 모두 수레에 올려놓자, 노인이 허리를 굽히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젊은이. 요즘 세상에 이렇게 선심 쓰는 분이 다 있다니." 노인이 주름진 눈가를 찡긋하며 웃었다. "복건성에 처음이시죠? 용문객잔에 가보세요. 성 안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삼층짜리 커다란 목조 건물이 보일 거예요. 그 집 국수가 일품이에요. 한 그릇 먹으면 며칠 굶은 것쯤은 싹 잊어버릴 거예요."
국수라는 말에 심장이 찔끔했다. 아버지가 끓여주시던 국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노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삐걱삐걱 멀어졌다. 사소한 만남이었으나,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졌다. 용문객잔. 아버지가 남긴 이름이자, 늙은 행상이 알려준 곳. 두 갈래의 인연이 한 점에서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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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을 들어서자, 복건성의 활기가 나를 한꺼번에 삼켰다.
넓은 대로 양편으로 주루(酒樓)와 전당포, 약재상과 비단 가게가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노점에서는 찐빵과 만두를 파는 아낙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고, 말을 탄 무사가 위풍당당하게 거리를 질주하면 행인들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거리 한복판에서 재주를 넘는 곡예사 주위로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그 너머로는 어딘가의 기루(妓樓)에서 흘러나오는 비파 소리가 저녁 공기를 수놓았다.
'이것이... 강호인가.'
마을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이 광경은 경이 그 자체였다. 사람 한 명 한 명에게서 이야기가 느껴졌다. 허리에 검을 찬 자, 등에 약초 보따리를 진 자, 눈빛이 매서운 자, 웃음이 해맑은 자. 이들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이 복건성이라는 거대한 도가니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용문객잔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걷다 보니, 삼층 높이의 목조 건물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처마 끝에 걸린 '龍門客棧'이라는 현판이 석양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술과 음식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일층 대청은 이미 손님들로 북적였다. 상인들이 목소리를 높여 흥정을 벌이고, 한쪽 구석에서는 무사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서 점소이가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나는 빈자리를 찾아 구석에 앉았다. 발밑의 마룻바닥이 유난히 차가웠다. 부엌 쪽에 가까운 자리였는데, 바닥의 돌이 마치 지하에서 냉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서늘했다. 별것 아닌 느낌이라 곧 잊었지만, 그때의 그 차가움이 나중에야 다른 의미로 떠오르게 될 줄은 몰랐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으므로 국수 한 그릇과 물 한 사발을 시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 사 년간의 고달픔이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국수 몇 가닥이 그릇 바닥에 남았다. 손이 저절로 움직여 보자기를 꺼내 남은 것을 싸두었다. 떠돌이 시절 몸에 밴 버릇이었다. 다음 끼니를 보장할 수 없는 삶을 사 년이나 하다 보면, 한 줌의 음식도 버리는 법을 잊게 된다.
그때였다.
나는 몰랐지만, 이층 창가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지만, 그 사람은 내가 성문 앞에서 노인의 짐을 주워주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고 했다. 점소이에게 "저 청년, 아까 성문 앞에서 늙은 행상의 짐수레를 일으켜 세우던 자가 아닌가?"라고 물었고, 점소이는 "네, 좀 전에 들어와 국수 한 그릇 시킨 손님이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서 오게."
낮고 침착한 음성이 내 귀에 꽂혔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이층에서 내려와 창가에 앉아 차를 음미하던 한 인물이 나를 보고 있었다.
첫눈에 범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졌다. 나이는 오십 중반쯤 되어 보였으나, 눈빛은 이십 대 청년처럼 형형하고 예리했다. 호방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입가에는 세월의 풍상이 새겨져 있었고, 넓은 어깨와 곧은 등에서는 오랜 세월 무공을 닦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의연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사람 주위로 보이지 않는 압력 같은 것이 감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깊은 호수 위에 서 있는 듯, 고요하되 그 아래에 측량할 수 없는 깊이가 잠들어 있는 느낌. 나 같은 초학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자네, 아까 성문 앞에서 노인의 짐수레를 도와준 청년이 아닌가?"
그가 물었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抱拳)의 예를 올렸다.
"아, 네... 그저 지나다 보니 어르신이 힘들어하셔서..."
"허허."
그가 웃었다. 엄한 얼굴과 달리 웃음소리에는 은근한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요즘 세상에 남의 일에 발을 멈추는 젊은이가 드문데. 앉게."
그가 맞은편 의자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거절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었다. 나는 국수 그릇을 들고 그의 탁자로 옮겨 앉았다.
"예의가 바른 청년일세. 복건성에 온 것을 환영하네."
그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나는 그제야 그 앞에 놓인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를 맡았다. 철관음(鐵觀音), 복건성의 명차였다.
"실례지만... 어르신의 존함은...?"
"남궁철이라 하네."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남궁.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세 마디 중 하나. 이 사람이, 아버지가 말한 그 사람인가?
표정이 변한 것을 눈치챘는지, 남궁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러나? 내 이름을 아는 건가?"
"아... 아닙니다. 다만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복건성과 용문객잔, 그리고 '남궁'이라는 이름을 남기셨기에..."
남궁철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의 형형한 눈 속에 스친 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슬픔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 자네 아버지의 성함이 어찌 되시나?"
"진무영입니다."
남궁철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객잔의 소란이 우리 사이의 침묵을 메웠지만, 그것은 마치 다른 세계의 소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무영... 그 친구가 결국..."
"아십니까? 제 아버지를."
"알고 있네."
남궁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눈이 창밖을 향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복건성의 밤하늘에 별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자네 아버지와 나는 옛 인연이 있었지. 허나 그 이야기는 지금 하기엔 이르네."
그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깊고 진지한 눈빛이었다.
"자네, 강호에서 살아갈 뜻이 있는가?"
"... 네. 그러하옵니다."
왜인지 모르게 대답이 단호하게 나왔다. 남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렇다면 한 가지 일러두지."
그가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객잔의 소란이 사라지고, 그의 음성만이 천근의 무게로 내 가슴에 박혔다.
**"강호는 뜻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네. 선의가 힘이 되려면, 먼저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 하지."**
짧은 말이었으나 무거웠다.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이 사람이, 처음 만난 나에게 던진 첫 번째 충고. 그것은 강호라는 세상에 대한 경고이자, 나를 시험하는 첫 관문이기도 했다.
남궁철이 점소이를 불러 차를 한 잔 더 시킨 뒤, 말을 이었다.
"며칠간 이 객잔에 머물게. 숙식은 내가 댈 테니 걱정 말게. 오늘은 쉬게. 자네에게 할 이야기는 내일부터 하겠네."
"그것은... 너무 과분한 호의이옵니다."
"과분하고 말고를 따질 처지가 아닐 텐데."
남궁철이 내 남루한 행색을 한 번 훑어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주머니에 동전 몇 닢뿐인 떠돌이에게 숙식 제공은 거절할 수 없는 호의였다.
"허나 잊지 말게."
남궁철의 눈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자네 아버지의 인연이 있으니, 나도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일단 푹 쉬게.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천천히 알아가면 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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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용문객잔 삼층의 허름한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불을 덮고 누웠으나, 결국 보따리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사 년간 노숙을 하며 들인 습관이었다. 보따리를 품에 안고 있으면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을 것 같았고, 온기라도 나누는 것 같았다.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손에 익지 않은 나무 손잡이. 그래도 이것을 쥐고 있으면 불안이 조금은 가시곤 했다.
창문 너머로 복건성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서 등불이 밝혀져 있었고, 야시장의 호객 소리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퉁소 소리가 밤공기에 실려왔다. 멀리 성벽 위에서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가 시각을 알리고 있었다.
남궁철.
그 이름을 가슴에 되새기며 나는 목침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그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아버지는 왜 마지막 순간에 이 이름을 남겼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남궁철은 "지금은 이르다"고 했다.
이를 것은 없었다. 나는 이제 겨우 강호의 문턱에 발을 올려놓은 것에 불과했다. 무공도, 경험도, 인맥도 없는 빈손의 청년이었다. 먼저 힘을 기르고,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다.
남궁철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천천히 알아가면 된다는 말. 그 여유로운 한마디가 오히려 마음을 다잡게 했다.
내일이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복건성에서의 첫 아침. 나의 강호 생활이 시작되는 날.
나는 눈을 감았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나를 깊은 잠 속으로 이끌었다.
복건성의 밤은 깊었고, 용문객잔의 등불은 새벽녘까지 꺼지지 않았다.
같은 시각, 이층 창가에서 남궁철은 식어버린 찻잔을 손에 쥔 채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아주 낮게 움직였다.
"무영이... 네 아들이 맞는가."
혼잣말이었다.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문 앞에서 노인의 짐을 주워주던 그 뒷모습이, 국수를 남겨 보자기에 싸두던 그 손이, 정말로 그 사내의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서두를 일은 아니었다. 이름 석 자만으로 벗의 아들을 자처하는 자가 강호에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며칠만 두고 보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사람의 본성은 사소한 순간에 드러나는 법이니까.
남궁철은 찻잔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용문객잔의 밤은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