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적무현과의 대면

제8장 삽화
폭풍우가 지나간 다음 날, 공기는 차갑고 맑았다. 세상이 씻긴 듯 투명했지만, 내 마음속의 먹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아침 일찍 사숙을 찾아뵈려 정자로 향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사숙만이 아닌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정자 맞은편, 빗물이 고인 석판 위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검은 장포(長袍)를 걸치고 두 팔을 뒤로 한 채,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태연한 모습이었다. 적무현(赤無玄). 나는 그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상식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장신(長身)에 마른 체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력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관자놀이까지 내려온 은발 섞인 머리카락, 깊이 패인 눈가의 주름, 그리고 검은 동공 속에서 차갑게 타오르는 불꽃. 사십 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알 수 없었다. 왼쪽 볼에서 턱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오래된 검상(劍傷)이 그의 과거를 말해주고 있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의 기세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을 뿐인데, 마치 거대한 벽 앞에 선 것처럼 숨이 막혔다. 내가 좁은동굴에서 상대한 흑사맹 무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것이 절정 고수의 위압감인가. "오랜만이군, 남궁." 적무현이 입을 열었다. 낮고 잔잔한 목소리였지만, 정자 안을 가득 채울 만큼 분명했다. 그 한마디에 공기가 진동하는 듯했다. 남궁철 사숙은 의자에 앉은 채 찻잔을 들고 있었다. 찻잔 위의 수면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사숙의 표정은 고요했다. "적무현. 삼십 년이 넘었구만." "그래. 삼십 년. 긴 세월이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무형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한때 벗이었던 두 사람. 지금은 적이 된 두 사람. 그 사이에 쌓인 세월의 무게가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적무현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그 눈빛이 닿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겨우 자세를 바로잡고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 아이가 네 제자인가?" "그렇네." "남궁가의 검법을 배웠군. 하지만... 아직 풋내가 나는구나." 모욕이 아니라 사실의 서술이었다. 그래서 더 뼈아팠다. 적무현은 나를 한 번 훑어본 것만으로 내 실력의 바닥을 꿰뚫어 본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풋내가 나는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보시죠."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나조차 놀랍게 했다.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사숙의 제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무인으로서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적무현의 눈가에 미세한 흥미가 스쳤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좋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아니, 한 걸음이라 해야 하나. 발이 움직였다고 인식한 순간, 그는 이미 내 앞 삼 장(丈) 거리에 와 있었다. 숨을 들이마실 틈도 없었다. 검을 들어 올렸지만, 그의 손날이 먼저 내 검등을 쳤다. 쨍! 검이 진동하며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손바닥의 살갗이 검자루와 뼈 사이에서 으깨지는 감각이었다. 충격이 손목뼈를 타고 팔꿈치까지 번졌고,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가 벌어지며 피가 스며들었다. 잡으려 했다. 검을 놓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지만, 이미 손아귀의 힘이 터져버린 뒤였다. 이어진 두 번째 타격에 검이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졌다. 손바닥을 펴자 검자루 모양 그대로 살이 짓눌린 자국이, 터진 물집에서 배어나온 피와 뒤섞여 붉은 줄을 그리고 있었다. 적무현은 검도 뽑지 않았다. 맨손으로, 그것도 장난하듯 가벼운 동작으로 나를 무장해제시킨 것이다. 세 번째 동작이 왔다. 그의 손가락이 내 어깨의 혈도를 찔렀다. 바늘이 아니라 쇠말뚝이 뼈를 관통한 것 같았다. 찔린 지점에서 냉기가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어깨에서 시작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허리까지, 다시 양 다리로 내려가며 사지가 얼어붙었다. 근육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릎을 세우려 했으나 허벅지가 돌덩이가 되어 있었고, 손가락을 쥐려 했으나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른 듯한 마비감 속에서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올려다본 적무현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세 초. 길게 잡아도 세 초였다. 그것이 나와 적무현의 격차였다. "그만." 사숙의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사숙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정자의 기둥이 진동하고, 바닥의 빗물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사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적무현과 나 사이에 섰다. 두 절정 고수의 기세가 정면으로 부딪혔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주변의 낙엽과 물방울이 공중에 떠올랐다. 나는 그 압력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적무현, 내 제자에게 손대는 것은 나에게 손대는 것과 같네." "남궁, 내가 진심으로 손을 댔다면 이 아이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알겠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사숙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지만, 적무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셨다. "용건이 무엇인가?" "두 번째 조각은 내 손에 있다. 첫 번째는 네 쪽에 있고, 세 번째의 행방도 알고 있겠지." 적무현이 사숙을 가리켰다.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소름이 돋았다. 적무현의 정보력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셋을 합쳐야 천잔검보가 완성된다. 서로 가진 것을 내놓든, 빼앗든, 결국은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건가?" "얼굴이나 보려 왔다. 옛 벗의." 적무현의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실렸다. 냉소인지, 그리움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사숙도 그것을 느끼신 듯 잠시 눈을 감으셨다. "우리가 벗이었던 시절은 끝났네, 무현." "끝났지. 네가 끝냈으니까." 그 한마디에 사숙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역사가 있었다. 삼십 년의 세월 속에 묻힌 어떤 사건이. 배신과 결별,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적무현이 몸을 돌렸다. 떠나려는 것이었다. "곧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적무현은 정자를 벗어났다. 그의 발걸음은 느긋했지만, 세 걸음만에 이미 정자에서 십여 장(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경공의 경지가 신출귀몰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모습은 아침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정자에 남은 것은 사숙과 나, 그리고 씁쓸한 침묵뿐이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며 몸을 일으켰다. 혈도를 찔린 어깨가 아직도 얼얼했지만, 더 아픈 것은 자존심이었다. 세 초. 고작 세 초 만에 무너졌다. 그것이 적무현과 나의 거리였다. "사숙... 저는 아직 너무 약합니다." 사숙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셨다. "약한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네. 자네는 성장하고 있어. 그리고 오늘의 경험이 자네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네." --- 숙소로 돌아왔을 때,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문을 닫고 침상에 걸터앉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미세한 떨림이 팔뚝을 타고 어깨까지 번졌다. 수치심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세 초라는 시간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검을 잡으려 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 순간의 무력감에 삼켜질 것 같았다. 그러나 검자루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적무현의 압도적인 기세가 환영처럼 되살아났다. 그의 손날이 검등을 치던 각도, 혈도를 찌르던 손가락의 궤적이 고스란히 감각으로 재현되었다. 손이 저절로 미끄러졌다. 손바닥에 땀이 차올라 검자루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검을 내려놓았다. 밤이 깊어지자 객잔의 소음이 하나둘 사라졌다. 잠들지 못할 것을 알기에, 아예 숙소를 빠져나와 뒷마당 구석 돌담 밑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필요했다. 누군가 보아준다면 위로의 말을 건넬 것이고, 그 위로를 받아들일 자격이 내게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밤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머리 위로 별이 지고 뜨고, 서리가 내렸다가 이슬로 바뀌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머릿속에는 적무현의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그 눈. 벌레를 밟는 것보다도 가벼운 동작으로 나를 꺾은 그 손. 동쪽 하늘에 첫 번째 빛줄기가 비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새벽의 찬 공기가 폐 속을 씻어냈다.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떨리는 손으로 다시 검을 잡았다. 이번에는 놓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객잔 뒷마당에서 홀로 수련에 몰두했다. 적무현에게 당한 그 세 번의 동작을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재생했다. 그의 첫 번째 움직임, 발을 내딛는 순간의 무게 이동. 두 번째, 검등을 치는 손날의 각도. 세 번째, 혈도를 찌르는 손가락의 궤적. 모두 복기할 수 있었다. 본 것은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눈은 보았으되 손과 발이 반응하지 못했다. 검을 잡고 초식을 반복했다. 사숙께서 가르쳐주신 남궁가의 기본 검법. 단순한 동작을 수백 번, 수천 번.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손바닥의 찢어진 살갗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그런데 자꾸 손이 미끄러졌다. 낮에 검등을 맞아 터진 손바닥이 땀과 피로 젖어 검자루 위에서 헛돌았다. 쥐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손가락이 풀렸고, 검이 회전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워 들었다. 다시 잡았다. 서른 번째 반복에서 또 미끄러졌다. 피와 땀이 범벅이 된 손바닥 위에서 검자루가 뱀처럼 빠져나갔다. 공포가 밀려왔다. 적무현이 다시 나타난다면, 이 손으로 검을 쥐고 있을 수나 있을까. 검을 쥐지 못하는 검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두려움이 손끝에서 시작되어 심장까지 타고 올라왔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검을 주워 들고, 또 쥐고, 미끄러지고, 다시 쥐었다. 멈추면 그 세 초의 기억에 잡아먹힐 것 같았으므로. 그때였다. 비급 조각에서 얼핏 보았던 도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氣)의 흐름을 나타낸 선, 경맥을 따라 회전하는 내력의 방향.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흐름을 따라 단전의 기를 움직여 보았다.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졌다. 단전에서 시작된 열기가 임맥(任脈)을 타고 올라가 백회(百會)를 관통하고, 다시 독맥(督脈)을 따라 내려와 단전으로 돌아왔다. 소주천(小周天)의 순환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기의 회전 속도가 빨라지고, 양이 늘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내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그 흐름에 집중했다. 시간 감각이 사라졌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오직 몸속을 흐르는 기의 물결만이 존재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소주천의 순환이 거듭될수록 내력은 한 겹 한 겹 두터워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떴을 때, 동쪽 하늘이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수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피로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에 생기가 넘쳤다.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힘이 아니라, 힘을 다루는 감각이. 이성(二星). 성장이란 이런 것인가. 거대한 벽 앞에 서서 절망하고, 그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내는 것. 적무현에게 받은 세 초간의 치욕이 나를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적무현의 경지에 비하면 이성은 아직 걸음마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강하다면, 내일은 또 더 강해질 수 있다. 나는 검을 칼집에 꽂고 객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얼굴을 비추었다. 따스한 빛이었다. 폭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무현은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때, 나는 세 초 만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객잔으로 돌아가자마자 남궁철 사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의 여유로운 얼굴이 아니었다. 눈가에 잠을 자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고, 허리에 찬 검의 끈이 풀려 있었다.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적무현이 이미 이곳까지 왔다. 그자와의 대면은 시작에 불과할 게다. 더 이상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 사숙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단호했다. 나는 아직 적무현에게 혈도를 찔려 마비된 팔이 얼얼했다. 반박할 처지가 아니었다. "곤륜으로 가거라. 그곳에 내 옛 벗이 있다. 당분간 몸을 숨기며 수련하기에 이보다 나은 곳은 없을 게다." 사숙이 품에서 신표(信標) 하나를 꺼내 건넸다. 곤륜파의 문양이 새겨진 목패였다. 나는 그것을 받아 쥐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숙." 남궁철이 멈칫했다.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숙이 아니라 사부라 불러라. 내 이제 자네를 정식 제자로 받아들이겠네." 목이 메었다. 사숙이라는 거리가 사부라는 한 글자로 바뀌는 순간, 이 사람의 곁에서 보낸 시간 전부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 포권의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사부." "감사는 살아 돌아와서 해라." 초우진에게 작별을 고하러 갔으나, 그는 이미 객잔을 비운 뒤였다. 점소이에게 물으니 "오늘 아침 일찍 짐을 챙겨 나가셨습니다"라고만 했다. 곽소준의 행방을 쫓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한마디 남기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지금은 발걸음을 멈출 때가 아니었다. 그날 밤, 나는 짐을 꾸리고 북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등 뒤로 멀어지는 객잔의 불빛이 오래도록 눈에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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